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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학이념/살레시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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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교의 건학 이념

본 학원은 청소년 교육에 일생을 바친 성 요한 보스코(伊 1815-1888)에 의하여 창립된 살레시오 여자수도회가 설립 경영하는 학교로서 그리스도교적인 인간관에 따른 全人敎育을 목표로 한다. 요한 보스코는 구체적인 교육목표를 “정직한 시민, 착실한 그리스도인의 형성”이라고 정의하였다. 즉 현세에서는 자기의 책임을 다하고 사랑과 봉사로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정직한 시민)일 뿐만 아니라, 참 생명을 영원히 누리는 행복한 사람(天上市民)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목표 달성을 위한 교육 방법은 성 요한 보스코의 예방교육법(Preventive System)이다.

'살레시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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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St. Francis de Sales 1564-1622)의 姓 sales의 韓國化된 명사이다.
프랑스人 주교요,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았다는 온유의 성인이다. "한 드럼의 식초로보다는 한 방울의 꿀로 더 많은 파리를 잡을 수 있다."는 그의 유명한 말은 물리적 힘보다는 온유와 겸손으로 사람을 얻을 수 있다는 그의 인생 철학을 담고 있다.
성 요한 보스코는 청소년 교육사명을 실현하는 데 가장 중요한 마음 자세는 바로 살레시오 성인의 온유한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창립한 교육 수도 단체명을 "살레시오會"라 이름 짓고, 회원들이 이 성인을 모범으로 주셨으므로 남녀 살레시오회가 경영하는 학교들이 "살레시오"라는 이름을 많이 갖고 있다.

성 요한 보스코(1815-1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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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8월15일,베키에서 태어난 요한 보스코는 일찌기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한 홀어머니 말가리다 오키에나의 보살핌을 받으며 다른 두 형제들과 함께 힘든 유년기를 보낸다.
요한 보스코가 아홉살 때 한 꿈을 꾸게되는데 그 꿈은 그의 일생을 계시해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꿈을 계기로 요한 보스코는 사제 성소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지만, 가난한 과부의 아들로서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아 남의 집 머슴살이며 상점의 점원 또는 직공 등을 하면서 신부가 되는데 필요한 공부의 길을 찾는다.

자연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공부이지만 천부적인 명석함을 지닌 그는, 신학교를 다 마치고 마침내 1841년 토리노 교구의 사제로 서품된다. 사제가 된 요한 보스코 신부(일반적으로‘돈 보스코’라 부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소년원에 수감되어 있는 청소년들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사회는 공업화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시골에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드는 청소년들로 인한 많은 혼란들이 있었다.

도시에 안정적인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시골 출신의 젊은이들은 쉽게 범죄의 상황에 빠져들게 되었고, 교도소는 항상 넘쳐나고 있었다.
보스코 신부는 버림받은 청소년들에게, 그들을 돌보아주고 곁에 있어주고 정직한 주인 밑에서 일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주면 정직한 시민과 착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을 체험으로 간파한다. 그리하여 보살펴주는 이가 아무도 없는 소년들을 위하여 오라토리오’라 부르는 기숙사를 세워 이들의 의식주를 마련해주고 일자리를 얻는 데에 필요한 기술과 공부를 가르쳐주는 일을 시작한다. 그의 보살핌을 받는 소년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자 보스코 신부는 많은 평신도들을 영입하여 자신의 일을 돕게 한다.
특히 보살핌을 받고 있는 소년들 가운데서 보다 성숙한 젊은이들이 보스코 신부를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이들을 주축으로 하여 수도회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보스코 신부는 마음을 매혹시키는 독특한 방법으로 청소년들을 사랑했다.
초창기 오라토리오의 600명이 넘는 소년들은 모두가 제각기 자신이 보스코 신부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으며, 자신들도 이에 대한 보답으로 보스코 신부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느껴지는 각별한 사랑의 친밀감으로 인하여 소년들은 보스코 신부를 ‘돈 보스코’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삶을 의지하였다.
그래서, 처음 수도회 설립의 뜻을 젊은이들에게 밝혔을 때, 많은 젊은이들은 수도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깊이 파악하지도 않고 단지 돈 보스코와 함께 일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일생을 바칠 수 있다고 하면서 참여하였던 것이고, 이렇게 해서 1854년 살레시오 수도회는 탄생되어 1869년 교황청의 정식 승인을 받는다.

보스코 신부는 살레시오 수도회에 이어 ‘살레시오 수녀회’와 평신도 단체인‘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창설하여 남녀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사도직의 기틀을 확고히 다졌다.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학교, 기숙사, 기술학교, 주일학교, 야간학교 등 다양한 교육기회를 제공한 요한 보스코 신부는 19세기의 가장 훌륭한 교육자이며, 동시에 2천 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놀랄만한 작가이고, 사회변혁의 순간에 교회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호교론자이며, 청소년 교육이라는 새로운 영성을 교회안에 심은 대영성가이기도 하다. “나는 청소년 여러분을 위하여, 공부하고, 나의 생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라는 확신처럼 돈 보스코는 자신의 모든 것을 청소년, 특히 보다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다 내어주고 1888년 1월 31일에 선종한다.
그리고 1934년 부활절,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성인으로 반포되어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성녀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1837-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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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자렐로는 1837년 5월 9일, 이탈리아 모르네세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맏딸이었던 그녀는 어머니를 도와 밭일도 해야 했다.
특히 포도밭일을 좋아했는데, 얼마나 열심히 남자처럼 일했던지 남자 일꾼들까지도 함께 일하기를 어려워 했다.

어렸을 때부터 마자렐로는 미사와 영성체를 소중히 여겼고, 발포나스카로 이사해 사는 동안 성당이 보이는 창가에서 감실 안에 계신예수님을 생각하며 하느님께 경배드리곤 했다.
1860년 전쟁 이후 모르네세에는 전염병과 장티푸스가 몰려와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본당 페스타리노 신부는 마자렐로의 친척집 식구가 모두 전염되어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자렐로에게 간호를 부탁했다.

22세의 마자렐로는 생명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페스타리노 신부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마자렐로의 정성어린 간호에 친척들은 나날이 회복되어 갔으나 마자렐로는 악성 장티푸스로 쓰러졌다. 마자렐로의 병세는 장례식 준비까지 생각할 만큼 대단했다.
이 병으로 마자렐로는 오랫동안 힘든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마자렐로는 힘을 쓰지 않으면서도 소녀들을 위해 도움을 베풀 수 있는 바느질을 배우자고 그의 단짝 친구인 페트로닐라에게 제안했다. 그래서 그들은 발렌티노 캄피 씨에게 가서 재봉을 배운 후, 모르네세에 재봉소를 차리고 열심히 일했다.또한 그 곳에서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소녀들을 받아들여 함께 지내게되면서부터, 재봉소는 소녀들을 위한 작은 기숙사가 되었다. 마자렐로와 페트로닐라는 이들에게 교리도 가르치며 하느님 안에서 즐겁게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왔다.

소녀들에게도 소년들에게와 같이 선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원했던 돈 보스코는 1864년 10월 7일 모르네세 방문 이후, 이를 실현할 사람들을 그들 가운데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돈 보스코는 그가 꿈꾸던 소녀들을 위한 선, 그의 일생을 이끌어 주었던 도움이신 마리아께 드릴 가장 큰 선물을 준비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도움이신 마리아께 드리는 살아있는 기념비' 즉, '살레시오 수녀회'의 창설이다. 1872년 8월 5일, 소녀들을 위해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돈 보스코 앞에서 서원을 발했다. 11명의 서원자들이 3년간의 유기서원을 발하므로써 살레시오 수녀회가 창설된 것이다.

"언제나 즐겁게 지내십시오. 절대로 우울해 하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미지근한 생활의 어머니입니다" 마자렐로는 늘 바른 판단과 의지로 수도회를 이끌었다. 그의 생존시에 이미 아메리카로 수녀들을 파견할 만큼 수도회가 클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만을 선택하려는 그녀의 끊임없는 노력과 소녀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녀는 한 알의 밀알이었다.

1881년 5월 14일 닛자에서 선종한 마자렐로는, 1938년 11월 20일에 시복되었고, 1951년 6월 24 일에 시성되었다.